글레숨

소설에서 발췌

 번역: 서진석

 

글레숨

 

알파 센타우리

혹은

북극성.

작은곰자리

 

북극성은 작은곰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 항성이 합쳐진 시스템이다. 때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거대한 변광성과 노란 엄지손가락 같은 두 위성이 그 시스템을 구성한다. 그 위성 중 하나는 한 가운데 별에서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의 17배 정도 떨어져 있고 가운데 별을 공전하는 데 30년이 걸린다. 다른 위성과 한 가운데 별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와 비교해 보았을 때 2,400배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고 공전 기간은 4만 2천 년이 걸린다.

북극성은 북극점에 가장 가깝고 우리가 파악한 우주에서는 48번째 밝기를 자랑한다. 이 별은 태양에 비교해 볼 때 4만5천배 밝고 45배 크다. 북반구 전체에서 보이며 일 년 내내 같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행가들에게 북쪽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극성 주변으로는 작은곰자리와 큰곰자리, 그리고 다른 별들이 같이 공전을 하고 있어 하늘의 중심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구로부터 432광년 떨어져 있다.

 

  1. 눈[雪]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그 여인의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근육이 튼실한 다리를 감싼 가죽이 발걸음을 더 어렵게 한다. 상처가 심한 여자의 어깨에서 피가 천천히 뚝뚝 떨어졌다. 눈부시도록 하얀 눈이 미처 방울이 되어 떨어지지 못하고 흘러내린 핏물을 빨아들이곤 했다.

여인은 완전히 혼자였다. 맨눈으로 그리고 본능적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공간 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뭐라도 있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직 집까지는 멀다.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도 알고 주변 상황도 잘 알아차리고 있었다. 주변 환경이 익숙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름길을 찾는 것은 자칫 목숨과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그냥 며칠 동안 열심히 집을 향해 차근차근 한 발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지쳤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잠은 곧 죽음이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온통 눈뿐이다. 그리고 늑대들.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나름 거리를 유지하며 여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따라오기만 한다. 여자는 콧구멍을 최대한 열어 조용히 공기의 냄새를 맡고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어떤 본능적 감각을 자극해야 할지 살폈다.

여자는 두렵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여인의 인생 자체도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

여자는 슬퍼할 줄을 몰랐다. 울 줄도 몰랐다. 동정할 줄도 몰랐다. 기다리거나 남을 믿는 것도 할 줄 몰랐다. 오직 싸우고 생존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늑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공기의 냄새와 심장 소리를 통해서 둘 중 누가 더 강한 존재인지 파악하는 것이 전부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늑대들은 이제 용기가 나는지 그 여인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회색 늑대들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늑대들의 낮은 울음소리, 그리고 눈부시도록 하얀 눈.

여자는 땅에서 커다란 나무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억센 팔로 강하게 부러뜨리고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온 힘을 다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늑대를 찔렀다.

눈발은 더 강해졌다.

 

 

셀리야는 문을 열었다. 햇빛과 땅에 하얗게 쌓인 눈 때문에 눈이 부셨던 셀리야는 눈을 가렸다. 은으로 만든 뱀 모양의 반지는 손가락의 절반 정도를 덮을 정도로 컸다. 언제나 은을 잔뜩 가져다주는 남편 곤다스 덕분에 셀리야도 은붙이를 꽤 가지고 있었다. 맑은 색깔의 각종 유리구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셀리야는 아무 때라도 동네 장인에게 가서 목걸이건 구슬이건 단추건 팔찌건 뭐든지 만들어 내놓으라고 지시만 내리면 끝이었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여자인지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양인지 이것저것 만들어 내놓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날이 요즘 따라 부쩍 많아졌다. 부족 사람들 모두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여자인지 알아야만 한다.

셀리야는 가죽옷을 조금 손보았다. 가죽이 자꾸 떨어져 나갔다. 셀리야는 쇠송곳으로 구멍을 뚫어서 단단한 양모를 대고 꿰매 보았다. 가죽을 고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 고쳐나 보다가 안 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나 줘 버리고 자신은 다른 새것을 만들어 가질 심산이다. 가죽 쯤은 남편 곤다스가 가져온 수레에 얼마든지 있다. 주변에 사는 사냥꾼들에게서 받은 물건들을 밖에 내다 팔기 위해 모아 놓은 것들이다. 셀리야는 남편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무거나 골라 가지면 되고 그렇다고 남편은 신경도 쓰지도 않는다. 곤다스는 언제나 아내에게 극진했고 하느님들과도 소통을 잘했다. 그뿐 아니라 먼 여행 후에는 피곤함에도 아랑곳없이 언제나 아내를 먼저 찾는 착한 남편인데다가 참으로 잘 생기기까지 했다. 밀짚 색깔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위로 모아 올려서 정수리에 묶고 다니는 그는 부족의 다른 남자들과 다름없이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얼굴에 큼지막한 흉터가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로마의 카르눈툼 요새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부르군트 부족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길 뻔했는데 곤다스와 전사들이 그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비와 천둥이 무시무시하게 땅으로 내려 꽃혔다고 했다. 부르군트 전사의 공격 때문에 생긴 건지 아니면 얼굴에 벼락을 맞았는지 자기도 그 흉터가 왜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곤다스는 그 사고를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상처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착한 곤다스는 아내를 위해서 손을 위로 올리기가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은팔찌를 가져왔다.

장작을 더 가져온 키르니스를 본 셀리야는 집안은 이제 따뜻하니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친정 아버지의 집에서도 불을 지피는 일을 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늙은이로 셀리야가 곤다스에게 시집오면서 같이 데리고 온 사람이다. 키르니스를 보는 사람들은 다 입을 모아 그 할아범은 나이가 너무 많아 제대로 할 만한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그래도 그에게 뭐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키르니스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맘대로 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퇴역한 지도 오래되어 검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체력도 이미 쇠하였지만 막대기 세 개만 있으면 어디서든 불을 붙이는 능력이 있었고 곰모양의 목걸이를 절대 벗는 법이 없었다. 모닥불 앞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라도 게르만 부족들은 언제라도 불시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전투에 항시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아마 그 목걸이는 그 간절함을 담아 세상 모든 신들의 자비로움을 가진 신들의 어머니에게 보호를 간구하는 도구인지도 몰랐다.

피를 흘리는 것을 보니 손을 벤 모양이다. 셀리야는 혀로 피를 무심하게 닦고는 밖에 아무 일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밖을 쳐다보았다. 태양이 높이 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올해는 더이상 눈이 내리지 않을 것 같다. 셀리야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 쉬어 가슴 깊은 곳까지 눈과 추위를 들이마셨다.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듯하여 가죽옷을 다시 한번 고쳐 입었다. 문을 닫았다. 가끔은 실내의 공기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섞여서 셀리야 주변을 맴돌곤 한다. 인생에서 자기 맘대로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현실이 셀리야에게는 몹시 탐탁지 않다. 바로 그의 남편 곤다스다. 그렇게 착하기만 한 사람이 이번엔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거의 반이나 칼자국이 난 얼굴을 하고 그 여자를 데려왔다. 잠시 정신을 놓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부르군트족들한테 당한 것이라 말했다. 셀리야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의심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카르눈툼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짐수레에는 가죽, 꿀, 호박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은, 동, 주석, 함석 같은 처음 보는 것들은 무엇에 쓰는 것들인지 가까이 가서 살펴보기도 했으나 그냥 가득히 쌓여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가끔은 젊은 남자들을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 여행으로 인해 다들 몹시 피곤해 보이기 일쑤였다. 그들 중 누가 혹시라도 곤다스를 공격해서 물건을 약탈하려고 시도했었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한 이들은 수레 뒤에 묶어 끌고 다니면서 노예로 팔거나 아니면 제물로 바치곤 했다.

그렇게 남자들만 끌고 오던 그가 이번엔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키르니스는 문 사이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셀리야 옆을 지나갔다. 거의 시력을 잃은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방향을 잘 잡지도 못했으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묻는 법도 없었다.

아직 여자도 아닌 어린아이였다. 마차로 실려 온 아이가 맨 뒤 칸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어려서 그런지 폴짝 잘 뛰어내렸다. 나이로 보나 건강 상태로 보나 셀리야는 그렇게 날렵하게 마차에서 뛰어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셀리야는 주먹을 쥐어서 손가락 끝으로 손바닥을 강하게 눌러보았다. 이제 더 이상 날렵하게 그렇게 뛰어내릴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손바닥을 더 세게 눌러보았다. 손을 떼자 살진 손바닥엔 활 같은 자국이 네 개가 남았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금방 사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 여자인지 아이인지 모르겠는 그 존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쓰러져 넘어지더니 일어나 한동안 마차에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내리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마치에 실려 왔으니 쓰러질 만도 하다. 정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그 아이는 겁을 잔뜩 먹고 누구라도 가까이 오면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에게 잡혀 온 늑대의 눈동자를 보는 듯했다. 그 계집이 겁을 먹든 말든 셀리야는 알 바 아니다. 셀리야도 그 계집아이에게 아무런 악감정을 품지 않고 있으니 그 아이도 굳이 겁을 낼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남자들은 물건들을 꺼내 담느라 여자들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짐을 내리는 남자들을 보는 척하면서 셀리야는 그 마지막 마차 칸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적을 알지 못하면 이길 방도가 없다. 남자들이 서로를 향해 뭐라 고래고래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몰려들었다. 곤다스 주변에는 장정들이 참 많았다. 변방에서 창과 칼을 들고 질서정연하고 용맹스럽게 싸우고 돌아온 그 남자들은 전투 중에서도 전리품과 부족장인 곤다스를 무사히 지키고 수호하였으니 이제 아이와 부인이 기다리는 자신의 집으로 가면 되었다.

착한 곤다스가 아내를 주려고 일부러 멀리서 가져와 채워준 은팔찌는 가운데는 좁고 끝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져 가는 모양이었는데 손을 들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셀리야가 남편 얼굴의 흉터 부위를 만져 보았다. 곤다스가 뒷걸음질 쳤다. 한 번도 뒷걸음질 치는 법이 없던 그가 이제 뒷걸음질을 친다. 셀리야가 다시 그의 상처를 만지려고 하자 이번에는 아예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남자들은 물건들을 커다란 자루에 나누어 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 다시 와서 자기 몫을 챙길 것이다. 우리의 착한 곤다스는 자기와 긴 여정에 참여했든 아니면 여기 마을에 남아있었든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이 분배해 줄 것이다.

장성한 성인인지 아니면 아직 어린아이인지 분간이 안 되는 그 여자는 부족 사람들과 달랐다. 여기서 흔한 밀집 색깔이 아닌 밝은 갈색 곱슬머리는 자연스럽게 출렁이고 있었고 눈동자 역시 갈색이지만 그보다는 더 밝고 맑은 빛이었다.

“이 애는 글레숨이야.”

곤다스가 말했다.

셀리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 곤다스가 옆에 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과 아직 보지 못했던 머리카락 색깔과 늑대의 눈빛, 그리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말을 못 해. 한 번도 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듣지도 못하는 걸 수도 있어.”

곤다스가 말했다.

“딱 봐도 알겠네.”

셀리야가 대답했다.

“이제 우리랑 같이 살 거야.”

곤다스가 말했다.

“마당 구석에 집을 하나 지어줄 거고, 거기서 우리와 같이 살게 될 거야.”

같이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진짜로 같이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들러붙는 파리들 때문에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던 말이 물동이를 뒤엎어 물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셀리야에게 그 풍경은 마치 자기 인생도 그 물줄기인양 쏟아져 흘러내리고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라 넌지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피곤이 역력한 말은 그 물동이마저 어딘가 보이지도 않을 먼 곳으로 차버릴 것 같다.

글레숨은 마차에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글레숨의 주변을 왔다 갔다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만지지 않았다. 글레숨이 점차 자신의 호흡을 되찾을 무렵 다른 이들도 역시 발걸음이 차분해졌고 모두 조금씩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셀리야는 손가락을 접어 날을 세어보았다. 달거리 피가 보이지 않는 날이 정말로 유독 많았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셀리야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곤다스와의 사이에서는 이미 겨울을 열 번이나 넘게 지낸 아들 벤티스가 있었다. 그는 이번에 내린 눈이 다 녹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면 전사가 될 만큼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러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장이 될지도 모르는 운명을 타고났다.

셀리야는 곤다스와 같이 살림을 시작한 첫여름에 벤티스를 낳았다. 벤티스는 셀리야 인생의 전부였고 심지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더해도 아들과 바꿀 수는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며칠을 더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달거리는 시작되지 않았고 마침내 큰 고민에 빠졌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저녁은 아침을 삼켰다. 셀리야는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뱃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떼어내긴 이미 너무 늦다.

셀리야는 문을 두들겼다. 한 노파가 문을 열었다. 그 노파는 이전에 늑대들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다리를 온통 잡아 뜯길 뻔한 순간에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지만 그때 뜯긴 흉터는 여전히 선명했다. 상처는 자연스레 다 아물었지만 통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아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오두막 내부는 한사람이 살기에 딱 적당할 정도로 아주 아담했다. 게다가 늑대에게 다리를 빼앗긴 노파가 혼자 살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집안 벽의 사방에는 온통 이상한 풀들이 잔뜩 걸려 있었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섞어놓은 약들이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집안엔 공기도 부족했고 바스러질 정도로 바짝 말린 식물들과 돼지비계 삶은 냄새, 칼란코에 이파리가 섞여 나는 냄새들은 셀리야의 심장 속으로 꽂혀 들어올 정도로 지독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땅이 움직이며 빙빙 돌기 시작했고 식물들이 다시 살아나 말라비틀어진 꽃잎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나뭇가지들이 뻗어 나와 셀리야의 다리를 휘감았다.

눈을 떴을 때 셀리야는 가죽옷에 덮인 채 땅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노파가 무언가 냄새가 고약한 것을 얼굴에 갖다 대자 셀리야는 눈에라도 들어갈 듯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눈까지 멀게 할 셈인가. 늑대들에게 다리를 뜯긴 이 노파는 뭐라도 할 인간이다. 이 할망구는 한여름에도 무슨 약초를 써서 맹물을 얼음으로도 바꿀 수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 자기의 장례식을 직접 맞이하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 할머니는 온갖 종류의 기분 나쁜 약들을 발라서 남자들의 상처를 낫게 할 수도 있다. 그 악취로 남자들이 온통 토하고 난리를 치는 동안 상처엔 새 살이 돋았다. 부러진 뼈를 다시 이을 수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할망구가 시키는 대로 서른 밤을 누워있거나 그래도 차도가 없으면 예순 밤을 누워있으면 이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걸어 다니고 일도 할 수가 있었다. 기침을 줄게 할 수도 있고 열을 내릴 수도 있고 고통을 안락하게 바꾸어 줄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산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 할머니는 늑대에게 뜯긴 다리도 직접 고쳤다. 애들이 숲에서 발견하고 마을에 데려왔을 땐 피를 너무 흘리고 숨도 거의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정신은 말짱하여 무슨 연고를 바르라고 애들에게 계속 지시를 내렸고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바르고 또 발라주었다. 희한한 약 냄새랑 고기 냄새에 딸꾹질을 그렇게 하면서도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다 바른 다음에는 상처 부위를 아마천으로 잘 감싸도록 했고 아이들 역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 해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마 그런 식으로 치료를 해줄 것이다. 그냥 남들을 위해 사는 것만이 그 할머니 인생의 목적인 듯 보였으나, 이번엔 자기가 죽을 지경이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시키는 대로 상처를 잘 감싸고 잘 묶는 아이들의 치료를 받는 동안 할머니는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그 끔찍한 일들을 어떻게 감내하나 싶었는데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늑대들은 자주 출몰했고 늙은 여자들은 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화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만약에라도 살아 돌아오면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시도를 해보았으나 십중팔구는 목숨을 살리지 못했고 그러면 끝내 신들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 버렸다. 아이들은 할머니들이 죽지 않고 살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래도 할머니들이 죽는 것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이 할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던 아이들은 누군가 그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는지 어떻게 지내시는가 살펴보려고 집으로 뛰어갔다. 할머니는 그동안 얼굴이 폭삭 늙어있었고 이전과 달리 제대로 걷지 못하고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긴 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여느 때와 같이 숲과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채취하고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또 하겠는가.

셀리야는 이유도 모른 채 그날 울기만 했다. 사람들 말로도 이 할머니 오두막에 들어오면 누구나 울음을 터뜨린다고 했다. 누군가는 죽은 사람들의 일로, 누군가는 산 사람들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의 상처는 다 비슷해서 그 크고 작음을 비교할 수는 없다.

노파가 셀리야의 머리를 쓰다듬자 점차 안정되면서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모든 나쁜 것들이 다 사라졌다.

“셀리야, 무슨 일이니?”

노파가 물었다.

“네 아이는 괜찮다. 마음 편하게 먹고 집에 가도 된다. 너한텐 모든 게 다 있으니 안심하고 집으로 가도 된다.”

“네, 전 없는 게 없어요.”

셀리야가 말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해서 온 건데?”

노파가 말했다.

셀리야는 이 노파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노파는 셀리야가 이 아기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셀리야는 그 할망구가 당장 자기에게 마법의 수프를 먹이고 아기를 밖으로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지 않는 것이 몹시 화가 났다.

“셀리야, 신들의 어머니를 몹시 노엽게 하는 일이다. 그런 생각일랑 말아라.”

그 말을 들은 셀리야는 까르륵 웃었다.

“셀리야,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거랑 네 남편 곤다스가 앞으로 가져올 은붙이를 다 준대도 난 너에게 그 국을 만들어줄 생각이 없다.”

셀리야는 다시 웃었다. 은으로 마음과 정신을 살 수 있다. 심지어 사람들은 은이 있으면 신들의 분노도 잠재울 수도 있다고 했다.

“셀리야, 너 아직 가진 게 많잖아. 난 그냥 늑대가 뜯어 먹은 다리밖에 없어. 그래도 난 이걸로 족하다.”

노파가 차분하게 말했다.

셀리야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인간이 있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저기요, 분명히 필요한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할머니한테도.

“내가 곤다스에게 가서 당신을 당장 숲에다가 갖다 버리라고 할 거야. 숲에는 약 끓여줄 사람도 없을 테니 정말 당신 따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당신 다리 뜯어먹은 늑대들이나 치료해 준다면 모를까.”

셀리야가 말했다.

“셀리야, 그러면 신들의 어머니의 분노를 산다. 그러면 안된다.”

“우리 남편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당신도 알잖아. 나는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노파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노파도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셀리야는 노파의 힘이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셀리야는 제대로 된 생각도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노파가 어떤 약을 주어도 효험을 볼 인간이 아니었다.

노파는 늑대들에게 물어뜯긴 다리를 끌면서 벽으로 기어가서는 말린 독말풀 한 줌과 이름 모를 풀이 무성히 자라있는 나뭇가지 한 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것들과 씨앗 등을 함께 섞더니 끓이기 시작했다. 이런 마법의 국을 끓일 때는 섞을 필요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놔두면 된다 했다.

그리고는 얼마 전 새로 빚은 예쁜 그릇을 꺼내서 국을 부었다. 그릇에 부은 국에 다른 풀들을 섞어 신들의 어머니에게 ‘용서하소서, 가끔 저희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나이다’라고 절을 하고 그 그릇을 셀리야에게 전해 주었다. 며칠 기다린 후 조금씩 마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피가 다시 보였다. 그리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남은 국은 다음번에 또 필요할지 모르니 버리지 않고 놔두기로 했다.

 

4, 안개

 

키르니스는 마른 장작을 직접 가져와 도끼질하고 올해 남겨진 겨울을 나는 데 쓰고도 남을 만큼 가득 쌓아놓았다. 우리의 노장 키르니스는 왜 또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하며 장작을 패는 것인지 사람들은 그를 몇 번이나 말렸다. 이미 부족장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충성하여 일했다고. 쓰던 창과 검이 저기 오두막 한가운데 벽에 의연하게 기대어 서서 주인과 같이 땅에 묻힐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냐고. 말이나 섞을 만한 연배의 사람들이 있기나 하냐고. 그리고 누가 나이 든 사람 말을 듣기나 하겠냐고. 키르니스는 나무를 한 아름 안고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와 셀리야 옆을 지나갔다. 그는 한쪽 다리에 꽤나 화려한 가죽신을 신고 있었는데, 무릎을 조이는 반짝이는 죔쇠가 있는 가죽띠에는 방울까지 달려 있고 노쇠한 다리를 들어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용히 쟁쟁 소리가 났다. 그 화려한 가죽신은 어떤 게르만 부족 전사의 다리에서 벗겨낸 것이었고 이전에는 끝이 길고 날카로워서 가슴을 찔러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라고도 했다. 키르니스 말로는 다른 한 짝이 또 있었다. 같은 게르만인 전사가 신던 것으로 똑같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 신발은 지금 신고 있는 한 짝처럼 가죽띠와 방울이 달려 있었고 얼마나 훌륭한지 다른 마을에서 구경을 올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쉽게 믿은 것이 잘못이었는지 그 한 짝은 어디로 가버리고 지금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한결같이 그 가죽 신발을 한쪽 다리만 신고 다니며 방울 소리만 쟁쟁 울려댈 뿐이다.

키르니스 영감, 그 신발 한 짝은 어디에 간 거예요, 할아버지는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면 키르니스는 응당 이렇게 대답했다.

“타버렸다.”

키르니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정말 타버렸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더 나이 많은 노인들 역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곤다스가 걷지도 못하고 겨우 서기 시작하던 때 곤다스의 아버지에게 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언뜻 들어서는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도무지 파악하기가 어려운 내용이었다. 네로 황제의 검투경기를 주관하던 율리아누스가 발트지역으로 전령을 보냈는데, 그가 이 곳의 호박을 로마로 가져가겠노라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바다를 건너온 기사들, 무역상들, 호박을 나르는 일꾼들에게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은 호박을 가져다주었고, 그러면 로마 사람들은 받은 호박을 돈으로 족족 바꿔 주었다. 쉬지도 않고 꼬박 40일이 걸려 왔다고 말하는 그들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무척 화가 나 있거나 몹시 피곤해 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은 햇빛에 피부가 번들거릴 정도로 멋졌고 땀을 흘리긴 했지만 거친 숨을 쉬고 발로 땅을 힘차게 구르는 모습으로 보건대 좋은 품종들인 듯했다. 그들의 땅에 발을 디디고 선 기사들의 창과 검은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과 같이 온 상인들은 여느 부족사람들과는 다르게 선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듯했다. 그러나 말이 안 통하는 아이스티 주민들은 이 사람들이 온 이유에 대해서 그저 여러 가지로 상상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투에서 많은 경험을 한 바 있던 부족장 곤다스는 이런 소식이 전달될 때마다 빠른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신들의 어머니가 전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부족의 성스러운 숲에 불러 모은 장로들과 여러 의논을 해보았지만 결국에는 직접 바닷가로 내려가 그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만 있다가는 알 수 없는 소문만 무성하게 안개처럼 퍼질 것이다.

신발 끈을 동여맨 키르니스는 방패와 가늘고 작은 철 끝이 박힌 창 등 적들이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어떤 순간에서도 대적할 수 있을 만한 날카로운 것들은 모두 챙겼다. 부족의 남자 중에서 가장 날렵하고 경험이 두터워 사람들로부터 부족장에 버금가는 굳은 신임을 얻은 키르니스는 언제나 부족장을 보좌하며 그에 걸맞은 임무를 수행했다.

“이번엔 안되네, 키르니스. 여기 있어 주게.”

곤다스의 아버지가 말했다.

“키르니스, 지금 나는 아들 곤다스가 있지 않은가. 자네의 일은 지금 아들 옆에 남아서 아들을 지켜주는 것일세.”

키르니스는 눈부시게 강한 햇살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리고 심호흡을 하며 마을에 남아있는 것이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지 욕되게 하는 것인지 고민을 해보았으나 부족장의 말에 토를 탈 수는 없었다.

곤다스의 아버지가 부족에서 내로라하는 강한 남자들과 날카롭다는 창이란 창은 다 가지고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전사들과 무역상들이 원하는 바가 선인지 악인지, 그냥 그들의 땅을 스쳐 지나가려고만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이 평화로울지 아니면 그들이 지나는 길에 도륙과 약탈만이 있을 것인지 아무런 소식도 전달해주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안개가 걷히자마자 말을 타고 멀리 도망한 이도 있었으나 키르니스를 비롯한 몇몇 믿을 만한 사람들의 보호를 받는 아이들과 여자들은 바닷가로 길을 떠났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기량이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노련한 전사인 키르니스는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키르니스는 본능적으로 이 소리가 천둥소리나 짐승들의 소리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말과 마차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적들이 그들의 땅에 온 것이다. 노련하고 강한 전사인 키르니스조차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수적으로도 자신들이 얼마나 열세일지 알만 했다. 게르만 족속인지, 저주받을 랑고바르드족인지, 아니면 고튼인지, 부르군트족인지, 죽음을 좋아하는 이들인지 평화를 바라는 이들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그들과 조우하거나 맞서 접전을 벌이지 않았는데도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들의 저의는 이제 불을 보듯 뻔했다.

키르니스는 수적으로 열악한 수하의 전사들과 날카로운 가시울타리 따위로 랑고바르드족의 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속히 멀리 달아나서 땅을 파 굴을 만들고 그 입구 주변을 들짐승들의 똥과 흙으로 잘 덮어서 적들이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곤다스야, 난 네 아빠를 지키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키르니스는 곤다스를 낚아채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쏜살같이 뛰었다.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방패를, 그리고 절규하며 따라오는 어머니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내달렸다. 아마 어머니는 아이의 생명이 달린 지금 이 순간 키르니스가 무언가에 정신이 홀렸다고 생각을 했거나, 아니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 마을 사람들을 깨워 노인이건 아이건 누구나 자기들을 따라오도록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땅의 울림은 더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고 적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심장이 얼어붙은 나머지 사람들은 조만간 추수를 하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해두어야 할 밭 위에서 갈 길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허우적대며 뛰어다녔다. 마을에 물밀듯 밀고 들어온 랑고바르드 병사들의 창날이 미처 도망하지 못하고 남겨진 부족 사람들의 등을 찌르고 검으로 심장을 도려 내었다. 남겨진 이들이 이승에의 마지막으로 외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사람들은 말없이 키르니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키르니스가 앞장서서 뛰어가는 동안 겨드랑이 사이에 끼인 곤다스는 곤히 잠이 들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혼자서 절규하고 있었다. 자기 아들을 그렇게 겨드랑이 밑에 끼고 달리는 사람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미친 녀석 같으니라고. 수중에 칼이 있었더라면 얼른 앞으로 달려 나가서 키르니스의 등을 찔러버릴 수 있을 텐데 칼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다가오는 땅울림소리와 함께 신발이 징징거리는 소리 역시 사그라지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는 어머니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자는 아이의 숨소리만 귀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는 겨드랑이 사이에 들려가면서도 깨지 않고 잘도 잔다. 아,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얼른 숨겨야 할 텐데. 어머니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없는 울음이었다. 저녁이 내려앉았고 바람이 불자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느냐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숲속에서 울려 나왔다.

키르니스는 잠시 무기와 아이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곤다스를 다시 안고 다른 사람들이 잘 뛰어오는지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몸을 돌려 확인해 보았다. 땅이 울리는 소리는 훨씬 가까워졌으나 날씨가 어두워져서 그들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키르니스는 곤다스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사람들을 최대한 땅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자기 손으로 땅을 파서 알아서 들어간 이도 있었으며 남자들은 그 구멍을 똥과 흙을 섞어 잘 덮었다. 키르니스를 따라온 부족 여자 중 힘이 있는 여자들은 칼과 촉이 짧고 날카로운 화살을 나누어 가졌다. 크기에 비해서 아주 날카로워서 거리에 상관없이 적들을 대적하기에 충분한 무기들이었다.

만약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거나 못 참고 칭얼대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마을로 향하기도 했다. 키르니스는 마을을 지켜주던 가시울타리가 불타 버린 것처럼 남아있는 가옥들의 운명이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공기도 건조하니 불을 끌 도리도 없을 것이다. 긴 검을 휘두르는 랑고바르드의 병사들은 욕심이 가득한 콧구멍을 마치 말이 콧바람을 내뿜듯 있는 대로 크게 벌렸다. 키르니스는 아내도 아이도 없었다. 곤다스의 아버지만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 일하다 보니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자신의 아이도 지켜야 했었을 테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흙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한 나무울타리 바로 옆에 있던 집이 완전히 타들어 갔다. 연기, 비명소리, 쇠가 부딪히는 소리, 죽어가면서 조용히 신들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키르니스는 목에 걸려 있는 멧돼지 모양 조각을 가만히 눌러보았다. 날 좀 보호해다오, 곤다스를 지켜다오, 이렇게 기원한 후 칼을 들어 적들을 찔렀다.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무조건 찔렀다. 창을 높이 쳐들면 악한 자들이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키르니스 몸에 묻은 피가 자기의 피인지 적들이 피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그냥 앞을 보고 찔러대기만 했다. 이미 수많은 전투를 겪은 연륜 있는 전사 키르니스는 단 한 번도 이러한 광분을 겪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니면 싸울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무 집 안으로 들어가 값진 것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챙겨 나오는 적들의 모습이 키르니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르니스 역시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비와 저주의 향기는 검은 연기보다 강했다.

그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죽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안된다. 곤다스가 있는 곳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를 지켜야 한다. 남아있던 부족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정작만이 감돌았다. 거기에는 오직 키르니스, 그리고 적들이 있었다. 웃고 떠들고 약탈한 물건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칼은 내려놓고 은을 쨍그랑거리고 있는 적들. 어느 집 한쪽 벽에 몸을 붙인 키르니스는 혹시라도 적들이 가까이 올지 모르니 창을 꼭 품고 있었다. 신발 한 짝이 없었다. 어쩌다가 끈이 풀리고 벗겨져서 불에 탄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카락도 타버렸다. 불길이 가까이 오자 풀밭에 누워 조용히 숲 쪽으로 기어갔다. 적들은 말 위에 앉아 가만히 소리를 지르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전투는 키르니스가 싸운 전투 중 가장 치열했고 또 인생 최후의 전투이기도 했다. 집들이 대부분 전소되었으나 곤다스와 그의 어머니를 다시 마을로 데리고 오기로 했다. 이미 어두운 밤이었으나 모두 정신을 잃은 듯 말을 못 할 정도로 마을은 파괴되어 있었다. 더 자세히 지켜볼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에 탄 잔해를 정리하러 모였다. 여기저기 던져진 물건들을 모았다. 랑고바르드 병사들이 버리고 간 말들도 몇 필 모을 수 있었고 그날 곤다스는 씩씩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키르니스는 방패와 창을 가져와 집에서 가장 큰 방 벽에 세워놓고는 죽음을 기다렸다. 그 후 키르니스는 말이 없어지고 아무것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곤다스의 아버지가 왔을 때도 아무 말 없이 전소된 마을을 둘러보며 아들 곤다스를 족장에게 건네주기만 했다. 왼쪽 다리는 가죽으로 휘감겨 있었고 오른발에 신겨 있던 신발만 평상시처럼 징징 울릴 뿐이었다.

집은 다시 지었고 은은 다시 모았다. 평상시와 같은 일상생활이 돌아왔다. 키르니스는 그저 나무를 가져오는 데만 몰두할 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하는 법은 없었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자기의 오두막에 앉아있거나 숲에 나가곤 했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곤다스가 춥지 않도록 어떻게든 추위에 대비할 준비를 시작했다. 가끔은 그냥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곤다스를 돌보았다. 그런다가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집에 돌아가 마음껏 심호흡하거나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아무 일이 없는지 무슨 소리라도 들릴라 치면 귀를 기울여서 지금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부족 사람들의 것인지 다른 이들의 것인지 살피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곤다스 아버지의 전투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 않았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안 낳은 그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르니스는 슬퍼하는 모습도 행복한 모습도 남들에게 함부로 보여주지 않았다.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채 그는 평온한 마음으로 신들의 어머니만이 아는 길을 오갈 뿐이었다.

그래도 어떤 날은 키르니스에게 장난을 걸고 싶은 아이들이 그를 찾아가 이렇게 놀리곤 했다.

“키르니스 할아버지, 늙은 우리 할아범, 그 신발 한 짝은 어디 갔나요, 정신은 어디에다가 두고 다니나요?”

“타버렸다.”

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정신을 태우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그때 네로 황제의 군사들이 무역로를 따라 발트해안까지 침범했다. 엄청난 양의 호박을 로마로 가져가 검투사들이 대결하는 원형극장과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펼쳐놓은 그물망을 장식했으며, 심지어 경기장의 모래나 시신을 운반하는 관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조차 호박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호박 조각부터 갓 태어난 아이의 무게만큼 나가는 커다란 호박까지 다양했다.

아이스티 부족장들은 한 명도 죽이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손님들은 원하는 호박을 받은 대가로 은, 동전 등 부족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통 크게 내어 주었다. 필요 없는 살육이 벌어지지 않고 관대하게 서로간 원하는 것들만 챙겨갈 수 있으면 손님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자기가 살던 곳으로 그냥 다시 돌아갔다.

 

  1. 눈물

 

그 해에도 여느 봄처럼 춤과 노래와 함께 인생을 만끽하고 신들의 어머니의 뜻을 깨달아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절이 어김 없이 도래했다. 그 축제는 여자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로 남자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거나 무역을 하는 등 자신들의 일이 있었고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는 일이나 풍성한 곡식을 추수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일 등 남자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맡았으니 남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자연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마음을 모을 수 없었다.

눈이 녹고 낮이 길어지면 여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들이 기다리는 그 날이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 늑대들에게 다리를 뜯긴 할머니가 갑자기 시간이 되었다고 여자들을 불러 모으면 그제야 젊은 계집, 늙은 할머니, 힘 좋은 여자, 병을 앓았던 여자, 부자, 가난뱅이 할 것 없이 제일 예쁘고 좋은 물건을 가지고 나왔고 황혼 무렵이면 머리를 땋고 여름 볕에 머릿결이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여러 약촛물로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아이들과 남자들은 버려두고 숲으로 뛰어들어가 나이가 많건 적건 하나 같이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젊은이처럼 마음껏 뛰어 돌아다녔다. 그때는 몸과 뼈의 통증, 일상의 피로 따윈 전혀 느끼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있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이 동산에 오를 기력만 있으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순간을 기다려왔고 오직 그 늙은이만이 그날의 도래가 언제인지 알고 준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모아 끓였고 특히 늙은이들을 위해서는 벨라돈나 풀로 연고를 만들었다. 모든 기운을 끌어안은 어리고 연약한 풀들이 그 그릇 안에 던져지고 늙은이들의 주문과 우물물의 영험함이 풀과 물의 기운을 불러냈다. 오직 노파들의 손에서만 약초들이 그렇게 변화할 수 있었다. 초록색이었던 풀이 짙다 못해 검은색으로 변했다. 약초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노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 노인들은 여자 마법사라도 된 양 그 마법 같은 능력으로 사람들을 고치기도 하고 또 자기 맘에 안 드는 이들에게 쓰기도 했다. 그러나 신들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직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그 노파만이 가능했고, 그만이 신들의 어머니에게 자비와 은총을 직접 구하거나 바로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별을 보고 점을 칠 줄 알았고 대낮이 충분히 길어지는 것이 언제쯤일지 그래서 몇 월 며칠에 축제를 즐기고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될지 알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철저하게 자신의 비밀을 숨겼다. 이미 나이도 충분히 들었으니 죽음 외에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다들 평온하게 지내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그 할머니는 다른 부족 사람들을 두고 먼저 가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는 그 할머니가 더 잘 알고 있다. 부족 사람 중 한 명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게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두 그 선택 받은 자신이 되기를 바랐고 믿었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부족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가장 적절한 사람을 찾아가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다. 선택은 신들의 어머니가 알아서 할 것이니 속세의 사람들은 그저 그 선택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평온하게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화려하게 피지 않은 작은 꽃망울을 꺾어 화관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그래도 그 해 첫 화관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서로의 머리에 씌어주면서 신선한 물을 뿌려주고 춤을 추었다. 친구인지 적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들은 없이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야 즐길 수 있는 기분이었다, 우울한 이든 즐거운 이든 모두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들이 노래를 선창하고 자기 차례가 되면 따라 불렀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불을 지피고 자신의 마음과 가정에 부족한 것들을 채워 달라고 기도했다. 그들은 밀, 보리, 수수 등의 추수가 잘 끝나도록, 호밀과 조가 많이 남아서 아이들이 굶지 않도록, 짐승이나 병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전쟁에 나간 남편들이 성공을 거두도록, 은과 여러 장신구를 자신들에게도 허락해 달라고, 그리고 아이가 없는 집은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고 아이가 많은 집은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도록 해달라고 여러 가지 기도를 올렸다. 그날은 신들의 어머니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든 이들의 간구를 듣고 눈물을 보이는 그런 명절이었다. 반대로 가장 사소한 욕심이라도 신들의 어머니에게 밉보일 수 있었다. 늑대에게 다리를 뜯긴 할머니가 그렇게 말해준 것이다. 그 할머니 이외에 누가 더 잘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할머니가 만든 마법의 국을 마셨다. 사이 좋게 나눠마셨다. 할머니는 누구에게 줄지 헷갈리지 않고 수프를 나눠주었다. 빨간 액체는 셀리야에게 주었고 셀리야는 잘 받아마셨다. 셀리야는 신들의 어머니의 말도 듣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언제든지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레숨도 얻어 마셨다. 글레숨은 그 축제의 자리에 자기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겁을 먹고 굳은 듯이 서 있는 글레숨 옆으로 다른 여인들이 다가와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다. 글레숨은 혹시 자기를 제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아, 글레숨.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그날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명절이 아니다. 그날엔 평범한 여인을 해치는 법은 없었다. 여자들은 호박 가루로 향초를 빚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는 가지 많은 보리수나무 아래 향초를 지폈다. 춤추는 사람들이 다치면 안 되었고, 또 신들의 어머니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살짝 취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글레숨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마법의 국을 따로 한잔 부어주었다. 글레숨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는 힘을 가질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글레숨이 준비되면 맞닥뜨려야 할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할머니는 글레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아가야, 네가 뭐라고 그런 고생을 했니, 이제 다 끝난다. 다 괜찮아. 해낼 수 있고말고. 정말 글레숨은 진정이 되었다. 겁에 질린 늑대 눈망울 같던 글레숨의 눈빛은 차분하고 고요하게 변했다.

다른 이들도 할머니가 만든 마법의 수프를 받아 마셨다. 그 늙은 할망구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별의 춤을 이끌 동안 다른 이들은 열에 휩싸인 듯 몸을 앞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손을 맞잡고 커다란 원을 그렸다. 단지 한없이 여리고 수동적인 것 같던 여자들의 내적 본능 속에 강인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여자들은 정확히 그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신들의 어머니조차도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것, 어떤 폭정과 폭거에도 맞서 싸울 만한 그런 강인함이었다. 노래가 잦아들자 모두 집으로 갔다. 아직 정신이 맑고 행복에 겨워 있던 노인 몇 명만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할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도록 허락된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래된 보리수나무 밑 향초는 이미 거의 다 타들어갔다. 노파들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벨라도나로 만든 약을 바르고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불렀으며,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할머니를 따라 다른 노파들도 전부 일어나 다른 부족의 늙은이들을 만나러 뛰어나갔다. 노파들은 까마귀로 변하고 검은 구름으로도 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가지각색의 은총과 저주를 약속한 신들의 어머니의 뜻을 떠올리며 보리수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콧노래를 불렀다. 삶이란 우리가 원하는대로 언제나 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참고 인내할 만한 것이다.

 

  1. 우유

 

곤다스는 여러 가지 좋은 물건들을 짐에 실었다. 맨 처음엔 호박을 큰 것, 작은 것, 가공 안 된 것들로 나누어 넣고 남은 공간에는 겨울을 지낼 만한 좋은 가죽을 있는 대로 집어넣어 카르눈툼으로 가는 여행 준비를 마쳤다. 로마 제국의 아퀼레이아로도 가야 할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 했다. 곤다스는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는 부족 내의 친밀한 남자 중에서도 가장 강인한 이들을 모아 조상들의 예언과 경고를 온몸에 머금은 성스러운 숲에 모이게 했다. 그 숲은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신들과 제일 가까이 자리잡고 있었고 또 그래서 아무도 방해하는 이가 없었다. 아퀼레이아에서는 사람들이 호박 원재료를 일단 되는대로 다 사들이고 나서 그 후에 가공을 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서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카르눈툼에서는 수익이 더 적고 중개상인들인 로마인들이 자기 돈을 챙기곤 했다. 지난번 아퀼레이아에서는 수레가 부서질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고 돈이 아니면 유리로 만든 그릇을 받기도 했다. 구리, 올리브, 주석 등은 동네 장인들이 몇 년을 쓰고도 남을 정도였으므로 주석 팔찌와 단추, 목걸이 등 여러 장신구를 찍어내어 동네 사람 중에는 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매일 매일 다른 장신구들로 골라가며 꾸미고 다닐 지경이었다.

장인들은 셀리야에게 가슴띠를 만들어주었다. 부족의 장인들은 외국에서나 배울 수 있는 그 새로운 기술을 혼자서도 잘 연마했다. 그 기술에 자기들만의 솜씨를 창의적으로 접목할 정도였다. 옆면으로는 두 개의 핀을 격자로 꽂아서 띠의 끄트머리를 둘러싸고 다른 것은 왼쪽에 또 다른 것은 오른쪽 가슴에 끼웠다. 머리 부분에는 반달과 같은 생긴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역시 격자무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었다. 평평한 부분에는 큰 원이 다섯 개 그려져 있었고 그 원들은 다른 작은 원들과 연결되어 또 다른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다른 크기의 원들이 가슴을 모두 덮고 있었다. 셀리야는 기분이 좋을 때나 부족에서 자신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고 싶을 때 그 가슴띠를 달곤 했다.

성스러운 숲에 들어간 셀리야는 나무 뒤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데 그런들 뭐 어떠랴.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도 역시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자 갑자기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나무들이 마법에 걸린 듯 부엉이처럼 낮은 소리로 우우하며 울었다. 그 소리가 잠잠해지길 바랐다. 그 소리 때문인지 겁도 나고 불안했다. 남자들은 남이 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러는지 소리를 죽여 이야기하느라 셀리야는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다고 곤다스가 말했다. 게르만인들이 상인들을 독살하고 부르군트, 마르코만니, 콰디 사람들은 호시탐탐 마차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남자들은 난도질당하거나 산 채로 끌려가 노예가 되고 호박은 마치 자기들 소유인양 하나도 남김없이 약탈해 간다는 등의 말도 들려왔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들은 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길에 아퀼레이아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행길에서 오합지졸 게르만인 강도들 뿐 아니라 무장된 병사들을 맞닥뜨리는 것도 각오해야 하며 호박이나 음식 같이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준비된 물건들은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바닥나지 않도록 잘 챙겨야 했다. 이번에 길을 나서면 그냥 빈 마차로 오는 것은 둘째치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곤다스는 최대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했다. 산을 지나서 통과하는 일정이니 가는 길만 해도 달포가 걸리는 먼 여행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이란 가끔은 선택의 여지를 많이 주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곤다스의 말에 찬성했고 그들은 소뿔로 만든 잔에 꿀술을 채워 앞으로의 합심을 맹세했다.

 

셀리야는 울었다. 남편을 잃기는 싫었다. 벤티스는 아직 너무 어렸다.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발을 감싸 안았다. 숲은 짐승들의 눈빛으로 빛났다. 셀리야는 집으로 뛰어갔다.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뛰었다. 숨이 가빴다.

아침이 되어 곤다스는 피곤해져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마음을 잡으니 조금 편해진 듯했다. 그렇게 한결 편해진 곤다스는 셀리야에서 며칠이 지나면 가장 강인한 남자들을 데리고 길을 떠날 것이라 말했다. 셀리야는 울면서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살만하지 않느냐고.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야망이 없다면 나를 어떻게 지도자라 부를 수 있겠소?”

곤다스가 되물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다. 곤다스는 셀리야를 마차 옆으로 이끌었다. 평상시에는 혹시 몰라 병사들이 번갈아 지키는 곳이었으나 이번에는 원하는 만큼 물건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곤다스의 말이 맞았다. 그는 부족장이고 그런 정신이 없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가장 커다란 덩어리를 챙기려는 셀리야에게 곤다스는 그런 것은 목에 매달고 다닐 수 없고 정과 칼로 조각 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남편과 아내는 감정도 공유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내의 본분이다.

곤다스가 없는 동안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노파에게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사이 글레숨이 조용히 이곳을 뜰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호박을 고르는 데만 신경 쓰기로 했다.

그때 셀리야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고 우유처럼 하얀 호박덩이가 마차 맨 밑에 누워있는 것을 보자 깊이 손을 뻗어 꺼냈다. 셀리야는 그것을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인생이 가득 찬 우유 한 방울. 호박 옆쪽으로는 굳어버린 피처럼 보이는 갈색 선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셀리야는 장인들에게 가서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이들은 제쳐두고 제일 먼저 목걸이를 만들어 보란 듯이 차고 다니면서 이곳에 진정한 실세가 누구인지 사람들과 신들에게 언제나 상기시켜 줄 참이다.

  1. 베타 행성

 

혹은

 

코카브

작은곰자리

 

아랍어로 별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온 코카브는 오렌지색을 띤 거대한 별로 북극성보다 조금 더 밝다. 작은곰자리에서 밝기로는 두 번째 별이며 전체 별 중에는 49번째다. 한때 코카브는 지금보다 북극성에 더 가까웠다. 알파 행성(현재의 북극성)과 베타행성(코카브) 중 어느 것인지는 정확지 않으나 한때 고대 발트인들은 이 둘 중 하나를 북극성으로 여겼다. 아랍 민족 등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는 코카브가 북극성이었다. 코카브는 태양보다 450배나 밝고 42배 더 크다. 지구에서는 대략 130광년 떨어져 있다. 이 별은 대략 295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안개

 

여성들의 축제가 끝나고 몇 주가 지나면 마을에 남아있는 군인들, 장사꾼들과 다른 마을남자들을 위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군인과 대공작이 되도록 선택받은 남자아이들의 입문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남자들은 그 행사를 기다리며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올해는 부족장 곤다스의 아들인 벤티스가 의식에 참여하는 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성스러운 숲을 정리하기 위해 풀을 베고 필요 없는 어린나무들을 잘라내었고 부족의 화려함과 부유함을 뽐내기 위해 다른 부족장들을 초청하는 등 호화로운 의식을 위한 다들 열심히 준비하였다.

그 행사에 참여할 수 없는 여자들은 과연 부족장의 아들이 자신에게 선택된 운명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 셀리야는 갖은 장신구를 되는대로 다 걸치고 눈부시게 장식했다. 햇볕은 따사로웠고 마치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 듯 날씨도 거칠지 않고 구름도 하늘을 덮지 않았다.

곤다스가 벤티스를 준비시킬 시간이 왔음을 알리자 남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의식이 시작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나 일은 계획한 대로와는 달리 아주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벤티스는 일어나서도 침대에 걸터앉아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은 터질 듯했고 동공도 잔뜩 커졌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누구와 대화를 하는 듯했고 산 사람이 묻는 말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양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옷 안쪽에 무슨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듯 옷을 갈기갈기 찢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청결한 그 집에서는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벌레들이 벽에서 기어 다닌다며 이상한 소리로 고함을 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라도 바퀴벌레나 방울뱀이 몰래 들어왔을지 몰라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으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벌레를 잡느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는 사이에 벤티스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한껏 성장한 자신의 성기를 가리기는커녕 자랑스럽게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냥 평민 남자가 그런다 해도 상상 못 할 수치일 것을 부족장의 아들이 저러고 있으니 오죽할까. 벤티스는 줄곧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물려고 하는 등 난동을 부렸고 곤다스가 보낸 남자들은 벤티스를 잡기 위해서 밧줄까지 가지고 뛰어다녔으나 겨우 그 수치를 감추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 집에 끌고 와서 가두고는 문까지 걸어 잠갔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곤다스의 군사 중에서 힘이 좋은 병사를 골라 그곳을 지키게 했다.

벤티스는 그렇게 거의 사흘을 더 날뛴 후에야 잠이 들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못 본 척해야 했고 본 사람들도 아는 척을 할 수 없다. 곤다스는 평상시에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부족장이었으나 화가 나면 자비심이란 없이 창을 휘둘러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목숨을 앗아갈 사람이었다.

손님들은 흩어져서 곤다스의 선물을 챙기고 병사들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먹고 마셨다. 부족장의 아들이 별건가? 아무리 잘난 사람들도 죽는 것은 똑같다.

“물 좀 가져다주지 그래.”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할머니가 셀리야에게 말했다.

셀리야는 벤티스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 물을 가져다주었고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벤티스의 일로 마음이 불안해진 셀리야는 뭔가 자신에게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신 중인 것이 틀림없었다. 할머니가 끓여준 마법의 국을 너무 조금 마신 것인가, 아니면 효과가 없는 것이었나, 아니면 그 망할 마녀 같은 할망구가 일부러 효능이 약하게 끓여준 것인가. 셀리야는 임신한 것이 확실했으나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해봐야 했다.

흰독말풀을 달인 물이 담긴 그릇을 쥐어 들었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일부러 아껴둔 것이었다. 지금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다. 분명 엄청난 고통에 정신이 나가서 밖으로 뛰어나가 사람들이 말려야 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릴 것이다. 비라도 내려 모든 고통이 씻겨 내려가게 해달라고 바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치 않는 것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국은 이미 다 마셔 버렸다. 원하는 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한 아이만 잉태하고 있던 그녀는 다른 운명의 몫까지 마셔 버리고 말았다.

 

  1. 눈물

 

내 이름은 글레숨이 아니라 블린데다. 나는 완전히 다른 부족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아이스티 민족은 맞다. 그러나 여기 그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 부족과 언어가 비슷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우리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곤다스처럼 무역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족 남자들도 호박을 구하러 다녔던 것은 알고 있다. 우리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고 그래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무역을 한다거나 전투에 대처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박이 없어도 잘 살았다. 밀을 재배하고 가축과 벌을 키우고 밀랍을 만들었다. 그걸로 로마에서 돈이나 호박 상인들이 받곤 하던 귀중품으로 바꾸어 집으로 가지고 오면 우리는 충분히 풍족했고 정작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누리고 살았다.

난 그렇게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머리카락과 눈 색깔이 모두 갈색이었던 터라 우리 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두 나를 마을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지만 끼니 때우는 일은 허락해 주었다.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고작 돼지들을 먹이거나 힘든 겨울날에는 남의집살이하는 식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이름도 끔찍했다. 누군가 말했다. 옛날에 다리와 팔, 몸의 어디서든 아이를 낳는 여자가 있었는데 신들의 어머니의 성미를 건드린 후 푸르기만 할 뿐 씨앗은 맺을 수 없는 갯버들나무로 변하였고, 우리 부모님은 내 이름을 그 나무 이름으로 지었다. 나처럼 못생긴 것들은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추한 계집은 내 대에서 끝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난 아직 어린아이인데, 내가 대체 뭘 안다고.

난 아마 그럭저럭 살았을 것이다. 아주 잘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숲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실 숲 말고는 어딜 다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도 난 어딘가에서 가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비가 끔찍이도 많이 내렸다. 그때 누군가 내 머리를 낚아채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질렀다. 귀신들도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그러나 나는 마차에 실려 갔고 그게 끝이었다.

마차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마차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타본 것이 처음이었다. 나무로 만든 바퀴가 덜컹거리며 움직이자마자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조용히 하라며 마차를 발로 차고 손바닥으로 땅땅 때리기도 했다. 다른 마차 칸에는 물건이 가득 실렸고 덮개로 단단하게 덮여있었다. 철장이 달린 작은 집처럼 생긴 뒤쪽 칸들에는 나처럼 불쌍하고 꾀죄죄한 사람들이 실려있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좀 더 잘 생기고 예쁜 것 같았다. 대부분 납치하기 쉬운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는데, 중간에 마차를 공격하려다가 사로잡힌 남자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도 꽁꽁 묶여서 우리와 같은 공간에 실렸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이동했다. 해가 계속 뜨고 졌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했다. 먹고 마실 것을 조금씩 나누기도 했다. 마차 밑바닥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마차는 어딘가로 계속 굴러갔고 우리는 점차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도 망각하게 되었다.

길이 점차 좋아지고 돌로 닦인 길로 들어설 무렵 우리는 군인들과 무역상들의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리라는 누군가의 말에 밖으로 나온 우리는 먼지에 쩔어서 냄새가 심하게 났고 다리는 힘이 풀려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조용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라 시켰다.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를 차고 나온 한 뚱뚱한 남자가 나를 돈과 바꿨다. 단지 나뿐이 아니라 예쁜 여자들도 몇 명 같이 데리고 갔다. 나 같이 못생기고 키도 작은 애가 뭐가 좋다고 저 여자들과 같이 데리고 가는 건지 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노예로 팔려 간 이후에도 여행을 계속 이어가야 했지만, 이전처럼 오래 걸리진 않았다.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도시의 이름은 아퀼레이아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도시를 어떻게 부르든 지옥은 똑같은 지옥이었다). 정문을 지나고 나서 멋지게 장식된 벽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흰색의 이층집이었다. 지붕은 빨갰고 위쪽에서 물이 작은 샘물처럼 졸졸 흐르다가 거대한 욕조 안으로 떨어졌다. 그 욕조는 바깥 뜰만이 아니라 실내 화랑에도 있었다. 실내 정원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꼬리를 가진 새들이 노닐고 있었고 커다란 나무들, 아담한 관목들 그리고 화단의 꽃들이 가위로 아름답게 재단되어서 정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안쪽 벽에는 사람과 자연의 풍광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가파를 정도로 높게 만들어진 석상은 정말 사실적으로 보였다. 천장 대부분은 지붕이 없었고 햇볕이 바로 내려꽂힐 수 있도록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햇빛에 반짝였고 하늘은 물 위에 비쳐 보였다. 벽과 바닥에 있는 모자이크는 아름다운 꿈에서나 보았을 법하게 화려했다. 커튼 역시 각양각색이었으며 의자도 아주 부드러웠고 침대는 부드러워 보이는 천으로 감싼 지지대를 여럿 달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매혹되었다. 그곳이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곳에서의 삶이 익숙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많이 울었다. 아주 조용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 훌륭했다. 내 일은 주인마님에게 옷을 골라서 정리하고 입혀드리는 등 그저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우리 주인마님은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방에는 각종 화려한 것들이 걸려 있었고 각종 금붙이 장신구들은 종류별로 여러 상자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나는 가방을 싸서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여자건 남자건 어울려 같이 놀았다.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 실컷 쉴 수 있었다. 여자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건들을 꺼내 자랑하며 놀았고 남자들은 그냥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튜닉 입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마님은 항상 다양한 색깔의 천들로 바느질해 놓은 비단 튜닉만 입었다. 나는 마님의 몸매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띠 두 개로 하나는 허리 쪽에 다른 하나는 가슴 쪽으로 묶어두었다. 가슴 주변에는 다른 천 띠를 묶었는데 가슴을 잘 지탱하고 또 봉긋하게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발도 신기고 금붙이도 매달고 뜨겁게 달구어진 집게로 머리카락을 다듬어 드리면 그제야 마님은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실 땐 언제나 행복한 표정이었고 가끔은 포도주에 취해있기도 했다. 마님이 돌아오면 옷을 벗겨 드리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이전에는 감히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도 많이 해보았다. 주인마님의 옷을 입어본다거나 공작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일 등이다. 사람들이 안 볼 때 욕조마다 옮겨 다니며 물을 튀겨보기도 했고 그림과 조각, 색실로 짜놓은 그림 등은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실컷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지루해질 때쯤에는 주인님 방문에 귀를 대고 엿듣곤 했다. 그는 나이 든 장사꾼이었는데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집트에서는 곡물과 리넨을, 스리랑카에서는 사파이어를, 중국에서는 비단을 그리고 발트에서는 호박을 가져다가 팔았다. 처음에는 그 나라들의 이름이 그저 마법의 주문처럼만 내 귀에 들렸으나 이제는 세상에 그런 나라들이 있다는 것쯤은 알 만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고 언젠가 그런 나라들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 그 나라들의 이름을 최대한 외워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사우나에 가는 것이 유독 좋았다. 거기서 주인마님이 옷 입는 것을 도와드려야 할 때가 있었다. 머리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멋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얼마나 높이 있는지 제대로 볼 수가 힘들 정도였다. 기둥과 바닥은 모두 대리석이었는데 실내는 온통 더운 김으로 가득 차서 정신을 놓고 있다간 미끄러져서 넘어지기 딱 좋았다. 우리 주인마님은 사우나에 가면 리본과 가슴을 당기는 끈 하나만 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튜닉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에 나의 발가벗은 못생긴 모습은 그 누구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여기 아퀼레이아에서는 내가 그렇게 못생겨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은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피부가 온통 검은 사람부터 해서 고향에서 보던 것처럼 나와 비슷한 흰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불렀던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세상의 다른 끝에 간다고 해서 갑자기 예뻐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내 발가벗은 모습은 한동안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우리 주인조차도 말이다. 주인 율리아누스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해가 지도록 주인마님이 어디론가 집을 비우고 돌아오지 않는 때마다 내 침소에 오곤 했다. 처음에 나를 억지로 침대에 눕혔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그는 나를 범했다. 피가 많이 났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인이 뱀처럼 기었다. 짐승 같은 인간, 여기서 그만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끝내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주먹을 쥔 채 누워서 눈물도 흘리지 않고 조용히 울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이 고통이 언제 사라질지 나 자신도 몰랐지만 이 더러운 느낌에 마침내 적응되고 말았다.

언젠가는 저녁이 되어갈 무렵, 주인마님을 마중 나갔었다. 주인마님이 나더러 정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히 자갈돌도 발로 툭툭 차고 개도 괴롭히고 있는데 누군가 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쥐고 나를 마차로 끌고 갔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한다던가 기도를 하는 짓을 그만둔 것이 이미 예전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내 힘으론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냥 주는 것만 잘 받아먹으면 된다. 글레숨. 나의 여자가 되어다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 거지? 난 글레숨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 남자 곤다스는 피곤이 역력한 다른 군인들과 함께 나를 철창이 없는 마차에 싣고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전보다는 상당히 인간적으로 대하는 듯했다. 어딘지는 몰랐다. 내가 하는 말이 그들의 말과 굉장히 비슷한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아주 비슷했고 가슴에는 멧돼지 모양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나는 목이 멘 듯이 조용히 있었다.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더 나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입을 열면 보통 안 좋은 일이 생긴다. 그냥 침묵하는 것이 낫다. 마차 바닥에 짚이랑 가죽이 덮여있기는 했으나 나무 바퀴는 자꾸 흔들렸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해가 여러 번 지고 떴다. 그들은 나를 공주처럼 먹였다. 내 몸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항상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속 흔들리는 마차에서 고생을 수도 없이 하고 잔뜩 게워낸 후에야 비로소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집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무랑 집들은 똑같았지만 사람들은 왠지 화가 나있는 듯 보였다. 내가 일부러 이곳에 원해서 온 것 마냥 말이다. 어쨌든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 사람들도 역시 나를 신들의 어머니가 전해 주신 끔찍하게 생긴 운명의 선물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곤다스만이 그렇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아버지 나이대의 사람이었으나 더 잘생기고 강인했다. 왠지 안심되었다.

그리고 내게 와서는 내가 살 집을 지어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집들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나 혼자 살라고 지어준 것이었다. 그 역시 다를 바 없이 짐승 같은 사람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어딘가 다르게 부드러웠고 손도 고왔으며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 난 못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내 소중한 글레숨.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게요.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기나 하나요?

 

  1. 우유

 

셀리야는 임신한 것이 맞았다. 배 안에 든 선택 받지 못한 운명의 올챙이는 계속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배가 너무 불러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냥 살이 좀 붙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곤다스는 장사치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한번 길을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적어도 몇 달은 걸리니 그동안 셀리야 혼자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뱃속의 계집아이는 필요가 없다. 벤티스 외에는 어떤 아이도 필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벤티스에게만 주어야 한다. 계집아이인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안 봐도 다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주변을 잘 둘러보지 않았다. 요즘 여자의 몸을 보는 사람들도 없고 셀리야가 차고 다니는 귀중품은 사람들이 이제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봄철이다. 힘 좋은 사람들은 벌판에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짐승들은 새끼를 낳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셀리야는 얼마든지 자거나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이 한 명이 자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사라져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른다. 신들의 어머니도 분명 뭔가 헷갈려 하실 것이다.

셀리야는 몰래 숲으로 나갔다. 늪을 헤치고 다녔다. 떨어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곳도 여기저기 올랐다. 몸을 구부리고 기어가도 보았다. 이러면 애를 떼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고통은 너무 심해졌고 끝내 양수도 터져버렸다. 셀리야는 작은 나무 하나를 강하게 움켜쥐고 이파리를 뽑으며 신음을 했다. 얼른 나와라, 이러다가 나 죽겠다. 이따금 아이가 사산할 때 아이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목숨도 같이 앗아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셀리야는 몸이 떨렸다. 피가 묻지 않게 옷을 벗었다.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가끔 정신도 혼미해졌다. 더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셀리야는 지쳐갔다. 들짐승들이 무슨 일인지 살피듯 가까이 오긴 했으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발길을 돌렸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그들의 눈에는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보였는가 보다.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할머니가 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일그러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얼른 갈 길 가시라고요. 할머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곳에 올 수는 없어요. 할머니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데 그럴 힘도 없네요. 어떻게든 저 노인네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쓸모도 없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 하고, 사람들이 그 노인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신들의 어머니는 아마 모르시겠지.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내가 몸을 추슬러서 힘을 얻기만 해보라지. 저 노인네쯤이야 금방 끝장낼 수 있다고. 저 할머니 혀가 터져버리게 하는 약을 만들어 먹이거나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도록 하는 연고를 만들어 온몸에 발라버릴 수도 있겠어. 내가 늑대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쉬운 상대는 아닐걸. 내가 만든 상처는 쉽게 안 나아. 아, 힘이 없으니 너무 아쉽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내장도 못 챙길 정도로 완전히 뭉개버려야 하는데.

셀리야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을 때 늑대에게 다리를 뜯긴 그 노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리 사이에 핏덩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자아이였다. 예상한 그대로 여자아이였다. 아주 여린, 정말 말 그대로 약하디약한 핏덩이였다. 그냥 어디론가 숨어버리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아주 조용히 숨만 쉬고 있다. 셀리야가 아기를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팔과 다리는 다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자 아이가 눈을 깜박인다. 그 약한 몸으로 어렵사리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아주 따뜻해 보인다. 하늘과 땅이 어울려 만든 합작품,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대체 어떤 힘으로 이 세상에 나온 거지. 아직은 여린 영혼, 너는 작은 나비 같은 봄날의 기적이구나.

셀리야는 일부러 가져온 칼로 엄마와 딸을 연결하게 해주고 있는 끈을 끊고 조심스럽게 아이를 잔디 위에 눕혀서 몸에서 모든 것들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벤티스를 낳아봐서 어떤지 잘 안다. 젖은 잔디로 다리와 몸의 피를 닦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조금 어지러웠다. 계집아이는 편히 누워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셀리야는 잔디를 한 움큼 뜯어서 새 둥지처럼 만들어서는 아이 얼굴 위에다 살짝 눌러주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팔을 뻗으며 깩깩거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거봐, 이렇게 쉬운 걸. 이제 하얀 천으로 감아서 어디에다가 잘 숨기기만 하면 된다.

이봐요, 할머니, 어때요, 잘 봤어요? 아무 도움 안 받고 나 혼자 잘 해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더 강한 거지? 할머니, 이것도 신들의 어머니의 뜻이었다고 말한 건가요? 아주 지겨울 정도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 신들의 어머니 뜻이 지금 어떤 꼬락서니인지 한번 보라고요. 하얀 천에 덮인 채 울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있잖아요.

셀리야는 천에 덮인 아이를 숲속 깊은 곳으로 최대한 멀리 가지고 들어가서 나뭇가지 아래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누구에게 욕이나 감사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어버린 피 같은 갈색 줄이 그어져 있는 하얀 우유 색깔 호박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 사내들과 함께 마차를 이끌고 돌아오던 곤다스는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한 전갈을 받았다. 로마의 황제가 전령들을 보냈는데 그중에 크빈트 아틸리유스라는 학식이 높은 이가 있다 했다. 그는 로마의 상인들이 발트해안지역까지 오는 데 걸릴 시간과 거리, 이동 경로 등 로마 황제의 관심을 충족시킬 만한 정보와 군인들 및 장사꾼들에게도 효용이 될 만한 북방민족들에 대한 자료를 모아 가져가려고 아이스티 땅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곤다스는 개인 호위병과 병사들, 동행하는 민간인들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고향 땅에서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출하고 능력 있는 몇몇 남자들만 남아서 곤다스와 함께 다니면서 인근에 로마인들이 있는지 수색하거나 그들이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을 맡기로 했다. 바퀴가 없는 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무역상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창과 무기로 보건대 게르만 인들은 아니었으므로 겁낼 이유는 없어 보였다. 로마 사람들은 나름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으므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는 좋은 물건을 손에 넣는 데 더 관심이 팔려 있었다.

부족장 곤다스는 권위에 맞게 예절을 갖춰 손님들을 맞았다. 곤다스 부족의 생활 터전인 숲에서 손님들을 맞이한 곤다스는 여행 중에 배운 라틴어로 손님들에게 말을 걸었다. 주로 배운 말은 거의 장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사한다면서 그 지역의 언어로 말도 못 하고 숫자도 못 세면 어찌 물건을 팔고 살 수 있으랴. 그러면 속이기 딱 쉬운 호구가 될 것임이 뻔하다.

아이스티 민족의 언어는 부족 언어 하나만 배우면 다른 부족과도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서로 비슷했다. 그런 아이스티 민족의 언어를 약간 구사하는 통역을 데리고 들어온 로마의 손님들은 낯선 땅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이스티들 사이에서는 통역이 별도로 필요 없었다. 그냥 주의 깊게 듣고 있으면 대부분의 의사는 통했다.

로마 사람들은 처음에는 장사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곤다스의 부족은 어떤 사람들인지, 주변에 이웃 부족은 얼마나 있는지, 여기는 어딘지, 강은 있는지, 도시는 있는지 등 곤다스로부터 듣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철로 만든 정으로 곤다스의 부족에서 만들어 판 듯한 밀랍으로 묶은 나무판자 위에 적어넣었다. 그들의 황제는 이미 다스리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 영역을 넓히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방의 야만인들로부터 얻을 만한 것이 더 있을지, 그들은 몇 명이나 되고 군대는 얼마나 강하고 혹시 로마 군사들이 다른 나라를 정벌하러 나갈 때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등을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호박이 난다는 것은 별다른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다. 로마 사람들이 쓰는 호박이 이곳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 아이스티인들이 로마로 직접 가지고 오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몸소 이리 멀리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호박 자체에 대한 필요보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로마인들을 이 바닷가까지 몰고 오긴 했다. 해안가에서 호박을 어떻게 발견해서 끌어올리는지, 허리띠만 하나 둘러맨 채 발가벗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호박꾼들 이야기, 긴 장대에 그물을 달아 바닷물 속에 내어던지고 끌어당기면 해초와 다른 쓰레기들 사이로 호박이 그물에 걸려 나온다는 이야기 등, 이 모든 것을 심도 있게 조사하여 황제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작은 조각들이었지만 가끔은 아이 머리 크기의 장대가 휠 정도로 큰 호박들도 있었다. 노련한 호박꾼들은 쓸데없이 그물을 들고 돌아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그물을 내려야 할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항상 호박이 가득한 그물을 걸려 올렸다. 그리고 바다에 가야 하는 시간도 잘 알았다. 그래도 혹시라도 그물이 텅 비는 날에는 미련 없이 호박 찾는 일을 쉬었다. 찬물을 두려워하는 법도 없었고 한겨울에도 낮이건 밤이건 물속에 들어가곤 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딱 좋은 파도를 타고 바닷가에 휩쓸려 온 호박을 남자들이 건져서 나오면 여자들이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건져 내온 호박을 한데 모으고 남자들은 불 옆에서 따뜻해진 이불을 덮고 다시 물질을 할 힘을 되찾을 때까지 몸을 데웠다.

곤다스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로마인들에게 들려주었다. 아이스티 상인들이 이 바닷가에서 나는 호박을 로마로 싣고 갈 때마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담배, 뼈, 가죽, 꿀 같은 온갖 희귀한 물건으로 바꿔 주었다. 그때 호박의 원석을 본 적은 있었지만, 여기서 경험하는 풍습과 기술은 로마인들에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문물이었다. 특히 바닷가에 사는 아이스티인들은 은붙이나 동전 같은 것들을 아주 좋아해서 로마 역사에 나오는 황제와 황비의 모습이 담긴 데나리우스와 세스테르티유스를 자루 가득히 싣고 오곤 했다. 로마에서는 황제가 바뀌면 그 즉시 새로운 황제의 모습으로 동전을 찍어내는데 그 동전들은 몇 달이 지나면 호박을 팔러 떠난 사람들이 장사해서 받은 돈으로 바닷가에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으레 사람들이 모여서 새 동전이 이전 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혹시 휜 동전은 없는지 코를 길게 빼고 눈을 터질 듯이 크게 떠서 살펴보곤 했다. 사람들은 자루 안에까지 머리를 집어넣어 돈들을 더 찾아냈다. 거기 그려진 사람이 누구든 다 똑같은 돈이었다.

호박꾼들은 누가 호박의 가치를 잘 알아주는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우선 크고 흴수록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파리나 벌레, 아니면 파충류 같은 수 세기 전에 살았던 동물이 박혀있는 호박은 쉽게 팔려나가는 편은 아니었으나 아퀼레이아에는 그 물건을 사 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호박꾼들은 겉으로 보기에 낚시꾼들처럼 보였으나 그렇더라도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안가에 사는 부인네들이 소란을 피우며 장사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가격도 올라가게 되니 그러기 전에 재빨리 사두는 게 좋았다. 얼마를 준다 한들 파는 사람이 싫다 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바닷가의 여인네들은 남자들만큼 힘이 좋아서 그네들이 소리를 지르면 귀에서 사흘 동안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라는 것은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회자하고 있었고 곤다스도 그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복작복작한 흥정이 벌어지는 동안 곤다스의 병사들은 근처 마을로 꿀술과 육포를 가지러 나갔다. 로마인들을 잘 대접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그날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잘 마무리해야 하기도 했다. 포도주에 더 익숙해져 있던 로마인들은 아이스티 부족 사람들이 직접 담근 술도 꺼리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이 담근 붉은 맥주보다 꿀로 만든 맥주가 더 맛있다고 몇 번이나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로마인들은 여행하면서도 언제라도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유리잔을 가지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 술잔에 꿀술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실수로 잔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에게 그런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유리잔 파편들을 주어다가 조각을 맞추면서 놀았다. 군인들과 장사치들이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어디서 놀다 왔는지 아이들의 얼굴엔 머루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봄이 되면 콩들과 순무 씨를 뿌리는 것이 아이들의 주된 일과였다. 정신없이 바깥에서 놀다가 브로치나 동전 같은 저희 눈에 별 볼 일 없는 것들은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 잔디밭에 그냥 던져두었고 무뎌진 창날 같은 것들을 발견해야 날 듯이 기뻐하며 심지어 자기들이 더 많이 갖겠다고 싸우기도 하였다.

로마인들이 같이 먼 길을 여행해 온 로마의 대장장이와 귀금속 장인들을 곤다스의 부족과 맺어주려 할 때는 남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곤다스는 자기 부족에도 유능한 장인들이 있음에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그들로부터는 그냥 기술을 전수 받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우리 부족의 여성들은 고향의 장인 실력을 더 좋아합니다. 여자들은 당연히 우리가 멀리서 가져온 구슬을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등 자기들이 원하는 색깔대로 유약을 바르고 목에 달고 다닙니다. 우리 장인들은 여인네들에게 익숙한 대로 철로 두드려 펴서 만든 단추, 격자무늬 구멍이 뚫린 목걸이, 반지 등 각양각색의 장식품을 뚝딱 만들어 냅니다. 여인들은 사치스러운 삶이 어떤 것인지 배웁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부유한 삶을 원합니다. 그리고 부유해질수록 갖고자 하는 것도 더 많아지니 남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곤다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로마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동감해 주었다. 바닷가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먹고 마셨다. 꿀술을 밤새워 마시던 곤다스는 심지어 바지에 흘리기도 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 사람들은 키르니스가 숲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신경을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발을 힘차게 내디뎌 걷다가 나뭇가지를 헛디뎌 넘어질 뻔한 순간에는 신발에 달린 방울이 쟁쟁 울려 멀리서 그 소리를 들은 짐승들이 겁을 먹기도 했다. 다른 들짐승들은 커다란 파리가 콧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지 연신 콧구멍을 긁어댄다. 그는 행복감에 겨울 때마다 밖에 나가 산딸기를 따기도 했고, 그때마다 들리는 새소리는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그의 기분은 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른 마을에 살던 한 여인과 몰래 사랑에 빠졌던 아름다운 순간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아주 아주 젊고 아름다운 그 여인은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키르니스의 아이는 아니었다) 남편은 항상 전쟁에 나가 있는 통에 뜨거운 열정으로 언제나 가득 차 있는 아내의 심성을 헤아려 주지는 못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아무 일 없이 흘러가 버릴 일처럼 보였다. 미래에 대한 기약 따위는 없이 서로 오가며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키르니스에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세상에서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오직 그 여인만 눈에 보였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갑자기 무감각해진 키르기스는 곤다스에게조차 걱정이 될 정도였다.

“키르니스 어르신, 어르신에게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우리 중에 제일 훌륭한 군인이시자 저희 가족과 가장 가까운 분이니 원하시는 배필이 있으면 누구든 혼인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해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키르니스 때문에 셀리야도 몹시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곤다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막역한 친구와도 같은 존재인 키르니스를 위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기 싫었지만 인생이 그런 것이지라 어쩔 수 없었다.

키르니스는 저녁마다 그곳에 가곤 했다. 점점 위험해져 가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과히 극성스러운 정도로 자주 그녀를 보러 갔다. 그러나 누가 키르니스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랴. 하찮은 인간들이 무어라 말하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 바보 같은 인간이여, 만약에 사내라면, 로마 황제의 군사가 되어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잘 빠진 말 위에 앉아 전쟁터에 나가서 칼을 휘두르고 있어야지 이런 속절 없는 사랑이 웬 말인가.

키르니스는 어제 본 듯 여전히 그 여인의 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을 많이 만져 주름져진 커다란 손. 그러나 그 큰 손으로도 그 여인 혼자 모든 살림을 맡아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란 사람은 가끔씩 돈만 집에 보내곤 했고 그마저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삯빨래와 삯바느질이라도 하며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돈이 없으면 먹는 일, 자는 일 같은 기본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돈은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알뜰히 절약하는 것이 중요했다. 크고 물을 많이 만져 주름졌지만 아주 아름답고 부드럽기만 했던 손, 그 손을 만지고 있으면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 다른 어떤 고운 손과도 그 손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 셀리야처럼 막돼먹은 여자의 손과는 절대 못 바꾼다.

옷 아래로 보이는 흰 피부는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대낮에는 그녀를 그냥 멀리서라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을 뱀처럼 매끈하고 키가 컸다. 누구라도 그녀 품에 한 번 안기면 마치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그 품에서 도망쳐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키르니스한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 옆에 있다면 돌이 되든 무엇이 되든 상관 없이 영원히 누워 잠들 수 있을 듯했다.

키르니스는 아침마다 물이 불어난 개울가에 가서 고개를 숙여 남편이 왔는가 살펴보곤 했다. 마음이 이전과는 달랐다.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마치 행복하게 살라고 운명이 정해준 듯 행복감이 물살처럼 몰려왔다.

가끔씩 남편이 돌아오곤 했다. 멀리서도 그의 젠채하는 걸음걸이를 볼 수 있었다. 빛나는 말을 타고 새 검을 높이 쳐들고 마을에 들어왔다. 로마의 군인이었으니 그런 것은 당연했다. 그는 언제나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걸으면서 아내는 하찮은 종인 듯 대하곤 했다. 수호자이자 하늘 같은 남편이 왔으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시키면 가져오고 내가라는 말이 전부였다. 아이들이 옆으로 다가가서 질질 짜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는 눈길도 주는 법이 없었고 고작 아이들의 엉덩이나 차주곤 했다. 그렇게 사악한 인간은 이전에는 없었다. 곤다스조차 그러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곤다스가 듣게 된다면 분노로 머리가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키르니스는 그런 놈이라면 당장이라도 칼로 찔러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그 여인은 간곡히 말렸다. 신들의 어머니를 두려워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다시 길을 떠나면 모든 것이 이전으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곤 했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러갔고 키르니스가 곤다스와 같이 어딘가 여행길에 오르지 않고 집에 있는 때는 귀한 것을 가져다주지는 못해도 언제나 그가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선사하곤 했다. 다른 마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매일 잔치에 가는 것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모습, 술 취한 이들이 주정 부리는 모습, 또 어느 곳에 가면 소리 지르고 강도질하는 사람들 천지라 조심하지 않으면 돈뿐만 아니라 생명도 빼앗길 수 있다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키르니스가 그렇게 속삭여주고 있는 동안 그 여인은 그의 머리카락, 등, 얼굴, 손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는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상대방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데 굳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가끔은 정말 그런 일들이 가능하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키르니스는 그가 들려준 로마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녀가 잘 믿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제법 자랐고 키르니스와의 생활에도 제법 적응이 되었다. 그들의 관계를 눈여겨보던 이웃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아무라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입이라도 뻥끗하게 되면 키르니스든 그녀의 남편이든 누구 한 명에게서는 해를 입을 것을 이웃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각자 남들의 삶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기로 했다. 사람마다 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각자 자신의 삶만 챙기면 된다.

 

그날 저녁 키르니스가 숲을 건너 그녀를 보러 갔을 때 남편은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 없이 살 수 없었던 키르니스는 그저 멀리서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미소마저 아름다운 그녀는 밖에 나와서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키르니스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밖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묻지 않고도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바람결에 손뼉을 치듯 찰랑거렸다. 그녀의 남편은 돼지털과 같이 억센 머리카락을 흔들며 혼자 흥얼거리고 있다.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머리카락이 멀리 숲에서도 보일 만큼 빛나고 반짝이도록 약초 달인 물로 머리를 감았다.

그들이 말달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된 후였다. 마을 사람들도, 사랑에 눈이 먼 키르니스도. 게르만인들이 무너뜨린 벽이 산산조각이 되어 쓰러졌다. 군인들은 더 위쪽으로 말을 채찍질하며 몰아갔다. 남자들은 창 하나 제대로 쥘 새도 없었다. 비명소리, 화염, 모든 것이 온통 뒤엉켜 있었고 게르만인들은 오직 앞을 보며 사람들을 찌르며 다녔다.

키르니스는 누구에게 붙잡리기라도 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몸이 자유롭게 된다고 하더라도 손에 칼자루조차 하나 들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저기에 나가는 즉시 게르만 병사들의 창에 찔릴 것은 뻔했다. 저 멀리서 사랑하는 여인이 남편을 뒤에 두고 아이들과 함께 숲을 향해 달려 나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여, 그대에겐 용맹한 군인 남편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군인은 자기의 부인을 지나쳐 자기 혼자 멀리 달아나 버렸다.

 여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본 키르니스는 얼른 숲에서 뛰어나와 여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빗나갔다.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맨 먼저 아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혹시 아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몰라 키르니스가 몸을 날렸지만 남편이 땅으로 고꾸라지더니 그녀 역시 쓰러졌다. 그 여인의 몸은 창에 찔려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키르니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공중에는 쉴새 없이 창들이 날아다녔다. 나도 좀 죽여주시오, 제발. 그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소리 없이 절규했으나 모두 자기 살길을 찾으려 뛰어다니느라 아무도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없었다. 하늘은 그날따라 유독 파랬다.

 

키르니스는 정처 없이 걷기만 했다. 신발이 반짝이며 방울 소리를 울렸고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창에 찔리지는 않았어도 그는 이미 거기서 죽은 목숨이었다고. 그 이후로는 그냥 그림자처럼만 남아있는 거라고. 진정한 군인이라면 그때 유령에게서라도 칼을 뺏어 들고 싸웠어야 했다고. 그날 저녁은 마침 귀신에 들린 듯 부엉이들만이 불행을 예고하듯 낮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

부엉이들이 울고 있는 숲속 깊은 곳 나뭇가지 밑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렸다. 부엉이들의 울음소리들은 산 것, 죽은 것 모두를 다시 깨워버릴 만하다.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키르니스는 이런 밤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발아래 나뭇가지들이 부서지며 내는 소리에 겁을 먹기 십상이었다. 무언가 더 크게 소리를 내고 있다. 키르니스가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마음속에 일고 있는 호기심에 가슴이 뛰었다. 짐승 소리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각양각색의 짐승 소리에 익숙해진 터라 적어도 짐승 소리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숲에서 필요 없이 오랜 시간 동안 걸어 다니다간 자칫하다 곰에게 사지를 찢길지 모른다.

그냥 집에나 가버릴까. 가서 누워 잠이라도 자면 걱정이 덜 할 텐데. 키르니스는 혼자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랴, 발걸음이 수풀 우거진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을. 돼지기름으로 잘 발린 신발은 달빛 아래서 빛났다. 키르니스는 이 길을 잘 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고 갈 길만 가면 된다.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이더냐.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비고 쳐다보지만 온통 칠흑같이 어두울 뿐이다. 무언가 바스락거리다가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허튼 생각이란 것은 잘 알지만 눈알을 노리는 짐승이라도 있을지 모르니 혹시 몰라 고개 숙이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눈알을 노리는 짐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나뭇잎에 가려진 가지에 걸린 천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꺼내 보려 했지만 산딸기 가시가 손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키르니스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손으로 잡힐 때까지 팔을 뻗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잠잠해진다. 키르니스는 혹시 자신이 이미 너무 늙어서 노망이 난 것은 아닌지, 혹여 귀신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 두루마리를 덤불 던져 버리려는 순간 안에서 아기가 뒤척인다. 진짜 아기였다. 주변에 사람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키르니스는 온몸의 털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넌 대체 어디서 온 아이인 거니. 아이가 여기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엄마도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이렇게 있다간 아이 엄마한테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맞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이 낯선 아이를 자기가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귀를 기울이고 공기의 냄새를 맡아보니 이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하다. 혹시 늑대라도 너를 해하진 않았을까, 이렇게 작은 꼬마를... 혹시 여우라도. 이건 신들의 어머니가 주시는 무슨 징조일지도 모른다고 키르니스는 굳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생각한다. 손에 들린 아이는 더 크게 울고 있다. 뭐라도 부탁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키르니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두루마리를 들추고 안을 들여다본다. 몇 번을 들여다보아도 아기가 맞다. 겨드랑이에 아기를 끼고 노쇠한 다리가 이끄는 대로 자기 집을 향해서 뛴다. 방울 소리도 안 나고 아이 울음소리도 잠들었다. 오직 키르니스만 숨을 헐떡인다. 이 나이에 이 고생을 해야 한다니. 땀과 눈물이 흘러내린다. 과연 이 죽을 것 같은 생명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제 더이상 울지도 않는다.

마을 언저리에서 몸을 돌려서 집으로 가는 길로 바로 향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없는 영혼인 양 아무 소리 없이 서성댄다. 이가 다 빠져버린 입으로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두루마리를 글레숨 집 문 앞에 놓는다. 왜 그랬는지는 그도 몰랐다. 아이는 조용하다. 아마도 흔들리며 오다가 잠이 들었는가 보다. 집으로 향해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아이를 나무 구유에 옮겨 눕힌다. 아이가 팔과 다리를 뻗는 데 불편할지 모른다. 키르니스는 말이 없다. 살려면 너도 조용히 해야 한다. 아가야.

늑대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노파는 잠결에 웃고 있었다. 곤다스는 가져온 돈을 다시 세어보는 중이었다.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온 것이다.